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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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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티움 해전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그리스 서해안 악티움에서 벌인 해전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로마 내전을 종식시켰으며,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어 로마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승리를 기념하여 니코폴리스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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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액티움 해전
로마자 표기Actiaca pugna
일부안토니우스의 내전
날짜기원전 31년 9월 2일
장소이오니아해, 그리스의 액티움 곶 인근
결과옥타비아누스의 결정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옥타비아누스 지지 로마 세력
교전 세력 2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지지 로마 세력,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지휘관
지휘관 1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마르쿠스 루리우스
지휘관 2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소시우스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
클레오파트라
병력
병력 1갤리선 250–400척
궁병 3,000명
배에 탑승한 보병 16,000명
병력 2대형 갤리선 250–500척
수송선 30–50척
배에 탑승한 보병 20,000–70,000명
궁병 2,000명
사상자
사상자 12,500명 전사
사상자 25,000명 이상 전사, 250척 침몰 또는 나포
이미지
액티움 해전을 기념하는 초기 1세기 부조의 세부 (광범위하게 복원됨)
액티움 해전을 기념하는 초기 1세기 부조의 세부 (광범위하게 복원됨)
로렌조 A. 카스트로의 '액티움 해전'
로렌조 A. 카스트로『액티움 해전』

2. 전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처형되고,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자 최고 제사장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정치적으로 실각하면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권력 투쟁은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두 사람의 대결 구도로 좁혀졌다.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이혼하며 로마와의 관계가 멀어진 안토니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을 잡고 동방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동방의 전제군주처럼 행동하며 로마의 공화정 전통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직접적인 대결 구도를 피하면서도 그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와의 친족 관계를 명분으로 내세워 안토니우스가 아닌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는 안토니우스를 로마 내부의 반역자가 아닌, 외국의 적과 결탁한 인물로 규정하여 전쟁의 명분을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이 선전포고는 사실상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의미했으며, 로마는 또다시 거대한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악티움 해전이라는 결정적인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2. 1. 제2차 삼두정치의 붕괴

집정관이자 삼두정치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로마 시대 흉상, 바티칸 박물관


복원된 젊은 옥타비아누스 시절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 (기원전 30년경 작)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레피두스 사이의 동맹인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37년 타렌툼에서 5년 임기로 갱신되었다.[8] 그러나 이 정치 체제는 여러 갈등 요인으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알려진 아들 카이사리온[50]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51][10]

갈등의 중심에는 삼두정치의 주요 인물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행보가 있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옥타비아 미노르를 사실상 버리고 이집트로 건너가 클레오파트라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카이사리온의 실질적인 계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8] 안토니우스의 이러한 행동은 로마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로마 정치인들은 안토니우스가 동방 속주에 배치된 막대한 로마 군단을 기반으로 이집트와 동방 왕국들의 독재자가 되려 하며, 이는 로마 공화국의 통합을 해치는 분리주의적 움직임이라고 의심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기반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양자이자 유일한 상속자로 인정받은 데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카이사르의 막대한 정치적, 경제적 유산을 확보하고 군단의 충성심을 얻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가장 유능하고 성공한 장군(''마기스테르 에퀴툼'')으로서 군 경력을 바탕으로 병사들과 퇴역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 이후 벌어진 리베라토레스의 내전에서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협력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안토니우스는 점차 독자적인 세력 구축에 나섰고,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 한다는 의심을 샀다. 특히 그가 옥타비아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클레오파트라의 공식적인 파트너가 되자 이러한 의심은 더욱 커졌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내세우려 했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 증여를 통해 당시 13세였던 카이사리온에게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공식적으로 권력을 실어주었다. 이는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위협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안토니우스가 과거 카이사르에게 디아뎀을 씌우려 했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그의 야심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공적으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쳤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원로원을 무시하고 카이사리온을 내세워 로마 전체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려 한다는 소문도 퍼뜨렸다.

제2차 삼두정치가 공식적으로 만료된 기원전 33년 말,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에 자신은 삼두정치가로 재임명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이 옥타비아누스의 야심에 맞서는 원로원의 옹호자로 비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불신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를 축출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영토를 차지했으며, 약속한 군단 병력을 보내지 않는 등 월권을 행사했다고 비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머물 권한이 없으며,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처형한 것은 불법이고, 아르메니아 왕을 배신한 행위는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맞받아쳤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약속된 전리품을 보내지 않고,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 및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적자로 인정한 것은 자신의 지위를 모욕하고 위협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기원전 32년, 로마 정계는 극심한 분열에 휩싸였다. 원로원의 3분의 1과 그해의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며 로마를 떠났다. 안토니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옥타비아와 공식적으로 이혼한 뒤,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에페소스로 가서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켰다. 이 함대의 상당 부분은 클레오파트라가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사모스를 거쳐 아테네로 이동했고, 아르메니아에 주둔하던 그의 육군도 아시아 해안으로 이동하여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의 지휘 아래 합류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반격을 준비했다. 기원전 32년, 그의 부관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와 동맹 관계였던 그리스 도시 메토네를 점령하며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결정적으로, 안토니우스의 측근이었던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여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넘겨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여기에는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이는 로마 시민들의 격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여론을 등에 업고 안토니우스를 기원전 31년의 집정관 직위에서 박탈시켰다. 나아가 그는 안토니우스를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원로원으로부터 이끌어냈다. 이 선전포고와 함께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모든 법적 권한을 박탈했다. 이로써 로마 공화정은 또다시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2. 2. 로마의 분열과 대립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레피두스 사이의 동맹인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37년 타렌툼에서 5년 임기로 갱신되었다.[8] 그러나 이 정치 체제는 옥타비아누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카이사리온[50][9]과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10]를 자신의 권력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균열이 생겼다.[51]

이러한 갈등은 삼두정치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옥타비아를 버리면서 심화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클레오파트라와 연인 관계를 맺고, 사실상 카이사리온의 계부 역할을 자처했다.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한 로마 원로원의 다수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공화국의 통합을 해치는 분리주의적 움직임을 보인다고 판단했다.

옥타비아누스의 명성과 군단의 충성심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그가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유일한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받으면서 크게 강화되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군대의 가장 유능하고 성공적인 고위 장교(마장관)로서 군 경력을 바탕으로 카이사르 병사들과 퇴역병들의 상당한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카이사르 암살 이후 벌어진 리베라토레스의 내전에서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협력하던 안토니우스는 점차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그가 로마의 단독 지배자가 되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가 옥타비아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로 가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자, 많은 로마 정치인들은 안토니우스가 동방의 로마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유지한 채 이집트와 동방 왕국들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려 한다고 우려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게 하려 시도하며 옥타비아누스의 권위에 도전했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13세였던 카이사리온에게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공식적으로 권력을 실어주었다(알렉산드리아 증여). 이러한 조치는 로마 공화정의 전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안토니우스가 과거 카이사르에게 디아뎀(왕관)을 제안했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는 선전 공세를 펼쳤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리온을 내세워 로마 제국 전체를 개인 왕국으로 만들려 하며, 로마의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려 한다고 비난했다.

제2차 삼두정치가 공식적으로 만료된 기원전 33년 말,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에 자신은 삼두정치가로 재임명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이 옥타비아누스의 야심에 맞서는 원로원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불신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의 권한을 부당하게 박탈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영토를 독차지했으며, 약속된 군단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머무를 권한이 없으며,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처형한 것은 불법이고, 아르메니아의 왕을 배신한 행위는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판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약속한 전리품을 보내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 및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적자로 인정한 것은 자신의 지위를 모욕하고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32년, 원로원의 3분의 1과 그해의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며 로마를 떠났다. 집정관들은 안토니우스의 요구 사항을 숨기려 했으나,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1월 1일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다음 회의에서 이에 강력히 반박했고, 결국 두 집정관은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에게 합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공개적으로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에페소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클레오파트라가 상당 부분 자금을 지원하여 동방 각지에서 모은 대규모 함대가 집결해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이후 사모스를 거쳐 아테네로 이동했으며, 아르메니아에 주둔하던 그의 육군도 아시아 해안으로 이동하여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의 지휘 하에 함선에 탑승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안토니우스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전략적 준비를 진행했다. 기원전 32년, 옥타비아누스의 부관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동맹 관계였던 그리스 도시 메토네를 점령하며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안토니우스의 측근이었던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며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넘겨주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공개했다. 유언장에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자식들에게 넘기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는 로마 시민들의 격렬한 분노를 유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이용해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기원전 31년의 집정관 직위에서 파면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개인을 직접 겨냥하는 대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반역자가 아닌 외국의 적과 싸우는 구도로 만들어 전쟁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 원로원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안토니우스가 가진 모든 법적 권한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내전으로 향하게 되었다.

3. 전투

안토니우스는 총사령부를 펠로폰네소스반도 연안의 파트라이에 두고, 그의 함대를 암브라키코스만으로 집결시켰다. 한편, 옥타비아누스 휘하의 아그리파는 암브라키코스만을 봉쇄하여 안토니우스 군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곶 앞바다에서 양측은 500척 이상의 함선을 동원하여 마침내 결전을 벌였다. 병력 수에서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우세했으나,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오파트라 휘하의 이집트 함대가 전장을 이탈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를 보고 클레오파트라를 뒤따라 후퇴했고, 지휘관을 잃은 안토니우스 군대는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큰 혼란에 빠지며 결국 궤멸되었다. 이 전투는 옥타비아누스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3. 1. 전투 준비

양군의 병력 배치. 빨간색이 옥타비아누스 군, 보라색이 안토니우스 군


기원전 32년 말, 안토니우스이탈리아를 공격할 의도로 코르키라섬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 함대가 바다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계획을 변경하여 파트라이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했다. 이때 그의 함대 대부분은 암브라키코스만에 배치되었고, 육군은 악티움 곶 근처에서 야영하며 암브라키코스만으로 들어가는 좁은 해협을 감시탑과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제안한 회담을 안토니우스가 거절하면서, 양측은 다음 해의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1년 초 몇 달 동안은 아그리파그리스 해안가에서 성공적인 약탈 작전을 벌여 안토니우스의 주의를 분산시킨 것 외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 8월경,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해협 북쪽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주둔지 근처에 상륙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 그의 모든 병력이 동맹군 주둔지와 함대가 겨울을 보낸 여러 곳에서 집결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아그리파는 그리스 해안 도시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고, 옥타비아누스군은 여러 차례 성공적인 기병 습격을 감행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암브라키코스만과 이오니아해 사이 해협의 북쪽 지역을 포기하고 병력을 남쪽 주둔지에만 집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중요 도시들에 수비 병력을 남기고 주력 함대는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집트가 부담하고 있던 막대한 군사 비용과 클레오파트라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이 제안은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후퇴 계획을 파악하고 이를 막을 방법을 논의했다. 처음에는 안토니우스가 떠나도록 내버려 둔 뒤 공격하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아그리파의 적극적인 공격 제안에 설득되어 직접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11][52] 기원전 31년 9월 1일, 옥타비아누스는 함대에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다음 날인 9월 2일은 날씨가 좋지 않고 바다가 거칠었지만, 전투 개시 신호가 울리자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해협을 빠져나와 전투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함대에 우측으로 기동하여 적 함대를 앞지르라고 명령했다.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안토니우스는 어쩔 수 없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3. 2. 전투 서열



기원전 31년 9월 2일 아침, 악티움만 (오늘날 프레베자) 입구에서 양측 함대가 마주쳤다.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안토니우스 함대'''

  • 함대 규모: 안토니우스는 약 500척의 함선을 이끌고 악티움에 집결했으나, 모든 함선에 승무원을 배치하지는 못했다. 플루타르코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안토니우스 진영 내 탈영과 질병 문제를 기록했으며, 이로 인해 실제 전투 가능 함선은 약 230척의 대형 전투 갤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기록은 140척까지 줄었다고 보기도 한다.
  • 함선 특징: 수적으로는 열세였을 수 있으나, 함선의 크기와 무게 면에서는 우위를 점했다. 주력함은 로마의 표준 전투선인 큉퀘레메였으며, 기함과 제독들의 함선은 더 큰 "데케레스"(10단노선)였다. "옥테레스"(8단노선)에는 중무장 해병 200명, 궁수, 최소 6대의 발리스타가 탑재되었다. 안토니우스의 함선은 옥타비아누스 함선보다 커서 근접전 시 적이 올라타기 어려웠고, 높은 위치에서 화살 등을 퍼붓기 유리했다. 선수 부분은 청동판과 네모난 목재로 보강되어 충각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높였다. 그러나 함선이 크고 무거워 기동성이 떨어졌으며, 함대에서 고립될 경우 적의 공격에 취약했다. 결정적으로 전투 직전 말라리아 발병 등으로 노잡이가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였다.[15][55]
  • 지휘관:
  • 총지휘: 안토니우스 (우익 직접 지휘)
  • 우익: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함께 지휘
  • 중앙: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마르쿠스 인스테이우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들)[53]
  • 좌익: 가이우스 소시우스 (초기 공격 개시)[53][13]
  • 육군: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54][13]
  • 후방 함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함대가 후방에 배치되었다.


'''옥타비아누스 함대'''

  • 함대 규모: 약 250척에서 400척 사이의 군함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토니우스 함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을 가능성이 높다.
  • 함선 특징: 주력함은 작고 빠른 리부르나였다. 크기는 작았지만 기동성이 뛰어나 거친 파도에서도 운용이 용이했고, 안토니우스의 대형 함선에 빠르게 접근하여 화살과 발리스타 공격을 가한 뒤 후퇴하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16][56] 옥타비아누스 측 선원들은 더 잘 훈련받고 전문적이었으며, 보급과 휴식 상태도 양호했다. 중형 발리스타는 약 약 182.88m의 유효 사거리를 가졌고, 근거리에서는 적함 측면을 관통할 수도 있었다. 아그리파가 고안한 하르팍스(갈고리)를 이용해 적선을 붙잡고 병사들이 넘어가는 전술도 사용했을 수 있다.[14]
  • 지휘관:
  • 총지휘: 옥타비아누스 (해안가 육상에서 전투 관찰)
  • 함대 총괄 및 좌익: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 (경험 많은 제독)
  • 중앙: 루키우스 아룬티우스[53][12]
  • 우익: 마르쿠스 루리우스[54][13]
  • 육군: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54][13]


전투 직전, 안토니우스의 장군 중 한 명인 퀸투스 델리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전투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는 사건도 있었다.[57][17] 안토니우스 측의 전직 집정관 두 명(겔리우스 푸블리콜라, 가이우스 소시우스)이 양익을 지휘했다는 점은 이 지점들에서 주요 교전이 예상되었음을 시사한다.

3. 3. 교전



기원전 32년 말,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상륙 공격을 계획하고 코르키라섬까지 이동했으나,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감시를 피해 파트라이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의 함대 대부분은 암브라키코스만에, 육군은 악티움 곶 인근에 주둔하며 만으로 들어가는 좁은 해협을 방어했다.

옥타비아누스의 회담 제안이 거절된 후, 양측은 기원전 31년 전투를 준비했다. 아그리파는 그리스 해안을 약탈하며 안토니우스의 주의를 분산시켰고, 옥타비아누스군은 해협 북쪽에 상륙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동맹군과 함대가 집결하는 데 시간이 걸려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아그리파의 공격과 옥타비아누스군의 기병 습격이 계속되자, 안토니우스는 해협 북쪽을 포기하고 병력을 남쪽 진영에 집중시켰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중요 거점에 수비 병력을 남기고 주 함대를 알렉산드리아로 후퇴시킬 것을 조언했으며, 이집트가 제공한 막대한 지원과 클레오파트라의 영향력으로 인해 이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장 바티스트 부르기뇽 당빌(Jean Baptiste Bourguignon d'Anville), 파리, 1734년 제작 해전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후퇴 계획을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그를 보내준 뒤 추격하려 했으나 아그리파의 설득으로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52][11] 9월 1일, 옥타비아누스는 함대에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다음 날인 9월 2일, 날씨는 습하고 바다는 거칠었다. 전투 신호가 울리자 안토니우스 함대가 해협을 빠져나와 정렬하기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잠시 주저하다가 함대에 우현으로 기동하여 안토니우스 함대를 지나치도록 명령했다. 포위될 것을 우려한 안토니우스는 결국 공격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약 140척(혹은 500척이라는 주장도 있음)의 함선을 보유했고, 옥타비아누스는 260척을 보유했다. 안토니우스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그의 함선들은 대부분 로마의 표준 대형 전함인 큉퀘레메와 소형 쿼드리레메로, 옥타비아누스의 함선보다 크고 무거워 안정적인 공격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관들의 기함은 '데케레스'(10단 노선)였고, '옥테레스'(8단 노선)에는 중무장 보병 200명, 궁수, 최소 6대의 발리스타가 탑재되었다. 이 대형 함선들은 높이가 높아 적이 올라타기 어려웠고, 청동판과 목재로 보강된 선수(뱃머리)는 충각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크기가 커서 옥타비아누스의 함선보다 기동성이 떨어졌다.[14] 하르팍스(아그리파가 적선을 붙잡고 탑승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는 이 작업을 다소 용이하게 만들었다. 갤리의 선수는 청동판과 네모나게 자른 목재로 장갑을 덧대어, 유사한 장비로 돌격 공격을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이러한 함선을 무력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를 부수어 함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함대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안토니우스 함선의 주요 약점은 기동성 부족이었다. 이러한 함선은 함대에서 고립되면 탑승 공격에 압도당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많은 함선은 노 젓는 승무원이 부족했다.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각한 말라리아가 발생했었다.[55][15]

로마 함선의 발리스타


반면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대부분 더 작은 "리부르니아" 선박으로 구성되었다. 그의 함선은 더 작았지만, 거친 파도에서도 운용 가능했고 안토니우스의 함선보다 기동성이 뛰어나 가까이 접근하여, 위쪽 갑판 승무원을 화살과 발리스타로 발사된 돌로 공격하고 후퇴할 수 있었다.[56][16] 게다가 그의 승무원들은 더 훈련이 잘 되고 전문적이며, 잘 먹고 휴식을 취했다. 중형 발리스타는 근거리에서 대부분의 전함의 측면을 관통할 수 있었고, 약 약 182.88m의 유효 사거리를 가졌다. 대부분의 발리스타는 함선의 전투 갑판에 있는 해병대를 겨냥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안토니우스의 장군 중 한 명인 퀸투스 델리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전투 계획을 넘겨주었다.[57][17]

9월 2일 정오가 지나자, 안토니우스는 해안 방어선의 보호를 벗어나 전열을 넓히며 마침내 교전을 시작해야 했다. 이를 본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바다 쪽으로 나아갔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가장 큰 함선들을 이용하여 그의 전선 북쪽 끝에 있는 아그리파의 부대를 격퇴하려고 했지만, 이 전략을 알고 있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 전체는 사정거리 밖에 머물렀다. 정오 무렵 함대들은 형성되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유인되지 않았으므로, 안토니우스는 공격해야 했다. 전투는 오후 내내 결정적인 결과 없이 계속되었다.

라우레이스 아 카스트로(Laureys a Castro)의 ''악티움 해전''(1672)


전투 중 후방에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갑자기 교전 없이 외해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이집트 함대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랑게(Lange)는 클레오파트라의 후퇴가 없었다면 안토니우스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58][18] 안토니우스는 신호를 관찰하지 못했고, 단순한 공황 상태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고, 도망치는 함대를 따라갔다. 공포심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어디에서나 돛이 펼쳐지고 탑과 기타 무거운 전투 장비가 버려졌다. 일부는 계속 싸웠고, 많은 함선이 던져진 불화살에 불타오른 밤 훨씬 후에야 전투가 끝났다.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운용할 수 없는 함선을 불태우고 나머지 함선들을 빽빽하게 모아 최선을 다했다. 많은 노잡이들이 사망하거나 복무할 수 없게 되면서, 안토니우스 함선의 강력한 충각 공격 전술이 불가능해졌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깃발을 단 소형 선박으로 옮겨 옥타비아누스의 전열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될 몇 척의 함선을 호위로 데리고 탈출했다. 남은 함선들은 나포되거나 침몰했다.

J. M. 카터는 해전에 대한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포위되었고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이점으로 돌리기 위해 함선들을 말굽 모양으로 모아 안전을 위해 해안에 가까이 머물렀다. 그러면 옥타비아누스의 함선이 접근하면 바다가 해안으로 밀어붙일 것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물리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므로, 그와 클레오파트라는 편대 후방에 머물렀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편대 북쪽 부분의 함선을 공격하도록 보냈다. 그는 그들을 북쪽으로 이동시켜 이때까지 빽빽하게 배치되었던 옥타비아누스의 함선들을 흩어지게 했다. 그는 소시우스에게 남은 함선들을 남쪽으로 흩어지게 했다.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 편대의 중간에 구멍이 생겼다. 안토니우스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함선에, 자신은 다른 함선에 타고 그 틈을 빠져나가 전군을 버리고 탈출했다.

전투가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타는 함선의 승무원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고, 밤새도록 배에 머물렀다. 다음 날, 육군의 상당수가 자신의 땅으로 탈출하지 않고 항복했거나, 마케도니아로 후퇴하는 길을 따라 항복하도록 강요받았고, 안토니우스의 진영이 점령되어 전쟁이 끝났다.

4. 여파

악티움 해전의 정치적 결과는 지대했다. 해전 이후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급격히 와해되었고, 약 19개 군단과 1만 2천 명의 기병이 육상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62][63] 함대에 이어 지상군마저 잃은 안토니우스는 사실상 법적 지위를 상실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집트로 도주했으나,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의 이집트 침공 과정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악티움에서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 즉 로마지중해)에 대한 유일하고 확실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 승리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가 사실상 제정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로마의 권력 기관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이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고 로마의 "제1 시민"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이집트의 항복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지속되어 온 헬레니즘 시대 역시 막을 내렸다.[64][28]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한편,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던 유대헤로데 대왕 등 동방의 군주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섰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일리리아 정복, 악티움 해전 승리, 이집트 정복을 기념하는 성대한 개선식을 3일 동안 거행했다.[27]

4. 1.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최후



악티움 해전에서의 패배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치명적이었다. 해전 이후 어둠을 틈타 19개 군단과 12,000명의 기병이 그를 버리고 떠났고, 함대에 이어 육상 병력마저 잃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더 이상 맞설 힘을 갖지 못했다.[24] 그는 임페리움(지휘권)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법적 지위를 잃은 도망자이자 반역자 신세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사모스섬에서 겨울을 보내며 전후 처리를 진행했다.

사모스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로부터 황금 왕관과 왕좌 등의 선물과 함께 아들들을 위해 퇴위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의 개선식에 클레오파트라를 내세울 생각이었기에, 그녀를 안심시키는 척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루키우스 피나리우스가 지휘하는 파라이토니움 주둔 군대를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장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보내 막대한 돈과 함께 아테네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봄이 되자 안토니우스는 양쪽에서 공격받는 상황에 처했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파라이토니움에서 진격해왔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묵인 하에 펠루시움에 상륙한 것으로 여겨진다. 안토니우스는 갈루스에게 패배하고 이집트로 후퇴하여 펠루시움으로 향했다.

기원전 30년 7월 31일, 알렉산드리아 인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잠시 승리를 거두었으나, 더 많은 병력이 이탈하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항할 힘을 완전히 상실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지친 병력을 상대로 거둔 작은 성공에 고무된 안토니우스는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이는 결정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배로 탈출하려던 시도마저 실패하자,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클레오파트라 자신이 퍼뜨린) 거짓 소식을 믿고 칼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62][63][24] 그는 즉시 죽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가 숨어있는 마우솔레움으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여 그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곧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잡혀 궁전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비를 구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무화과 바구니에 숨겨 들여온 코브라(아스프)에게 물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옥타비아누스는 같은 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처형했다. 안토니우스의 자녀들 중에서는 장남 안틸루스를 제외하고는 살려두었다.[25][26]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 용기를 존경한다는 명목과 자신의 자비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로마식으로 성대한 합동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로마 전역에 애도의 날이 선포되었고, 안토니우스 군단의 일부가 장례 행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과거 패배한 적들에게 자비를 거의 보이지 않았던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 이후 많은 반대자들을 사면하며 대중적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행보의 일환이기도 했다.[27]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멸망하고 이집트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헬레니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64][28]

4. 2. 로마 제정의 시작

아우구스투스 시대 악티움 카메오. 네 명의 "트리톤"이 끄는 사륜 전차를 탄 옥타비아누스를 묘사하고 있으며, 각 측면의 두 트리톤은 해전 승리의 상징을 들고 있다.


악티움 해전의 정치적 결과는 로마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전 이후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급격히 와해되었다. 약 19개 군단과 1만 2천 명의 기병이 육상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62][63] 함대에 이어 지상군마저 잃은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옥타비아누스와 맞설 힘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임페리움(최고 명령권)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법적 지위를 상실한 도망자이자 반역자 신세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승리 후 그리스와 아시아 지역을 순방하고 사모스섬에서 겨울을 보냈으나, 브룬디시움(현 브린디시)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고 퇴역병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도 했다.

한편, 이집트로 도망친 안토니우스는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30년 봄,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서쪽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동쪽 펠루시움에서 이집트를 공격해왔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근처에서 잠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거짓 소문에 속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고,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그녀가 숨어있던 마우솔레움(능묘)으로 옮겨져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62][63]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비를 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원전 30년 8월 1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기록은 그녀가 독사(아스프)에 물려 죽었다고 전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아들이라 주장했던 카이사리온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앴다.

옥타비아누스 야영지 기념비의 테라스 벽, 배의 램에 대한 절단면
옥타비아누스 야영지 기념비의 테라스 벽, 배의 램에 대한 절단면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지중해 세계("마레 노스트룸", 우리의 바다)에 대한 유일하고 확실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 승리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사실상 제정으로의 전환을 확정 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모든 로마의 권력 기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으며, 이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고 스스로를 프린켑스(제1 시민)로 칭하며 로마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이집트가 항복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이어져 온 헬레니즘 시대도 막을 내렸다.[64][28]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어 로마 제국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 로마식 장례를 치러 주는 등 패자에 대한 관용을 보이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는 로마 시민들에게 그의 자비심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계산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27] 또한 그는 로마로 돌아와 일리리아 정복, 악티움 해전 승리, 이집트 정복을 기념하는 성대한 개선식을 3일 동안 거행했다. 승리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이 벌어진 암브라키아 만 인근에 니코폴리스(승리의 도시)를 건설하고,[29] 자신이 진영을 쳤던 언덕에는 안토니우스 함대의 충각(뱃머리 뿔)으로 장식한 승전 기념비를 세웠다.[30]

5. 한국의 관점: 인물 및 사건 재평가

(내용 없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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